[문화] 국가 情報 역량은 政略 대상일 수 없다

2015-07-24

국가 情報 역량은 政略 대상일 수 없다


‘국정원 직원이 본연의 업무 수행에 있어 한치의 주저함이나 회피함이 없도록 조직을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18일 자살로 생을 마감한 국가정보원 직원이 유서를 통해 남긴 말이다. ‘본연의 업무’라는 표현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목숨을 끊는 순간까지도 ‘조직’과 ‘업무’에 대한 고뇌의 끈을 놓지 못한 한 공직자의 죽음이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 사람의 죽음마저도 괴담의 재료로 삼고 있다. 차량 번호판이 조작됐다느니, 유서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경위서 같다느니, 가족들의 실종 신고가 석연치 않다느니, 꼬리 자르기를 위한 타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느니 하는 괴담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민간인 사찰이 결코 없었음을 죽음으로 항변하고 있음에도 이미 많은 사람은 국정원이 대대적으로 민간인을 사찰하고 있는 것처럼 의심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국정원이 이탈리아 업체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사실에서 시작됐다. 이를 두고 야당은 국정원이 무차별적인 민간인 사찰을 진행한 증거라고 주장했고, 일부 언론은 프로그램 구입 시점을 문제 삼아 국정원이 지난 대선에 개입한 명백한 증거라고 불을 지폈다. 국정원은 이 프로그램이 국내 민간인 사찰용으로 결코 쓰인 일이 없다고 반박했다. 지금으로선 어느 쪽의 말이 진실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과제다. 만약 조사 결과 민간인 사찰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 원인이 제도에 있다면 제도를 개선하고 사람의 문제라면 사람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정원이 타도하거나 해체돼야 할 대상이 아닌 한 잘 못된 점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아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국정원은 북한의 위협, 테러, 사이버 공격, 산업스파이 등으로부터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재산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이번 사태로 국정원 위장용 사이버 가명이나 사이버안보팀의 지휘 라인 등이 완전히 노출돼 버렸다. 눈앞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국가의 정보(情報) 역량을 노출하거나 훼손하는 우(愚)를 범해선 안 된다. 


전 세계 대다수 국가의 정보기관은 업무 특성상 예외 없이 감청을 하고 있다. 다만, 법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적법 감청이어야 한다. 그런데 통신의 도구가 유선에서 무선 또는 인터넷으로 진화하면서 통신사업자 또는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의 도움 없이는 감청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미국·영국·독일 등 선진국들은 통신사업자에게 감청설비 구축을 의무화하는 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통신사업자에게 휴대전화, 포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감청이 가능한 장비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돼 있으나 제대로 심의조차 안 되고 있다. 불법 사찰의 우려가 있으면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보완 대책을 세우면 될 일이지 법안 심의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국정원이 그 본연의 업무를 하지 못하고 직원들도 자긍심과 사명감을 잃어버린다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인 위기가 될 수 있다.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고 국정원이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정치권이 이 문제를 단순히 정략적(政略的) 차원에서 접근해선 곤란하다. 정치적 이해득실보다는 국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진상조사와 보완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문화일보 2015. 7. 24 포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507240103391100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