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재판은 정치’ 판사와 司法권력 향방

2017-09-05

‘재판은 정치’ 판사와 司法권력 향방


히스패닉계로는 최초이고 여성으로는 세 번째로 미국 연방대법관이 된 소니아 소토마요르는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판사는 법률을 사실에 적용할 뿐이지 자신의 감정을 사실에 이입할 수 없다”는 답변을 한 바 있다. 히스패닉계이면서 여성이므로 인종적·성적 기준에 영향을 받는 감성적 판단이 법률적 판단보다 앞설 수 있을 것이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발언이었다. 최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도 이민자의 어려운 가정환경, 소아당뇨병으로 인한 질병의 고통, 순탄치 않은 결혼생활, 법조계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등으로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판사로서 어떤 경우에도 감성적이거나 편향적인 판결을 하지 않았다고 그는 자부한다. 


우리와 크게 관계없는 미국 사법부(司法府)의 이야기를 꺼낸 것은 며칠 전 너무도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인천지방법원 오현석 판사가 지난달 30일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재판이 곧 정치라고 말해도 좋은 측면이 있다’ ‘남의 해석일 뿐인 대법원의 해석, 통념, 여론 등을 추종하거나 복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3000명 가까운 법관 가운데 더러 튀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 판사는 법원 내 진보적 성향의 연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며, 이 모임의 초대 회장이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다. 더욱이 오 판사는 최근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재조사하는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 사법부를 주도하는 주류적 분위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법관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비해 민주적 정당성이 약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헌법은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적 정당성이 약한 법관에게 어떠한 정치적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오로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단할 수 있도록 강력한 헌법적 보장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헌법이 보장해 주는 정치적 중립의 자유와 의무를 법관 스스로가 부정한다는 것은 황당한 일이다. 사법부가 있음에도 헌법재판소를 따로 두는 것은 사법부의 정치화를 막기 위해서다. 정치 문제에 사법부가 관여할 경우 사법부 역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아예 정치적 고려가 수반되는 사건은 사법부의 관할에서 배제한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을 ‘정치행위’로, 대법원의 ‘판례’를 ‘남의 해석’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물론 판례는 시대적 상황과 법 이론의 발전에 따라 변경될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을 변경할 때에는 깊이 있는 학술적 논의와 재판 연구 등을 통해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서 하는 것이 관례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법적 안정성과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법원의 판례를 남의 해석쯤으로 보고 있는 현직 법관의 시각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잖아도 요즘 사법부를 바라보는 국민의 걱정이 크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판결이 나오면 ‘환호’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판결이 나오면 ‘적폐’로 몰아붙이는 작금의 정치적 분위기에서 법관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하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원칙과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위기의 사법부를 구할 유일 해법일 수 있다. 오 판사의 시각이 사법부의 주류적 분위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문화일보 2017. 9. 5 포럼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709050107311100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