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치판사’와 자의적 法治의 위험성

2019-03-27

‘정치판사’와 자의적 法治의 위험성


시민 가운데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는 것보다 법에 의해 지배되는 게 낫다. 그래서 비록 법의 수호자들이라도 법에 복종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유능한 시민 한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가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는 수많은 희생의 피를 감수하면서까지 시민혁명과 저항으로 사람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를 이끌어냈다. 법이 정해 놓은 기준을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정파적 이념에 따라 기준을 달리한다면 그것은 이미 법의 지배가 아닌 사람의 지배다.

환경부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전(前)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기관 임원들에게 부당한 사퇴 압력을 가한 혐의로 청구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 대한 구속 영장이 26일 기각됐다. 영장은 얼마든지 기각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다만, 그 기각 사유가 너무나 자의적이라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문제다. 전 정권의 공공기관 인사 및 감찰을 신뢰할 수 없는 분위기였으므로 새 정부 장관이 적극적으로 감찰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거나,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있었다거나, 피의자가 퇴직했기 때문에 관련자들과 접촉이 쉽지 않으므로 증거 인멸 가능성이 작다는 등의 기각 사유는 거의 궤변에 가깝다.

이런 황당한 일이 비단 법원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도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 대한 재수사 권고를 하면서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과 이중희 전 민정비서관 등은 수사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런데 당시 공직기강비서관이던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제외했다. 원칙 없는 자의적 기준에 따른 편 가르기로 보기에 충분하다. ‘재판이 곧 정치’라고 대놓고 말한 판사가 지금 사법부의 일부가 아니라 다수는 아닌지 너무나 우려된다.

법원과 검찰이 완전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고위층일수록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과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과 검찰의 그 조직 자체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해야 한다. 그게 법원과 검찰의 숙명이다. 그래서 법원과 검찰을 법치주의의 마지막 보루라 하는 것이다. 원칙과 기준이 흔들리면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사용한 편법이 나중에 칼날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올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국민이 납득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법원과 검찰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은 또 다른 적폐로 기억될 뿐이다.

법치주의의 보루가 되레 청산의 대상이 되는 적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법원이든 검찰이든 정권의 눈치를 보면 볼수록 조직의 입지는 약해지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법치를 지키려고 몸부림칠수록 조직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높아진다. 법원이나 검찰의 고위층이 정권의 눈치 보기나 코드 맞추기에 급급할수록 오히려 일선 법관과 검사는 국민의 바람과 헌법이 부여한 숭고한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법·검(法檢)이 정치권의 눈치 보기나 코드 맞추기를 거부하고 의연하게 법치주의를 지킬 때 정치권은 법원과 검찰을 어려워하고 함부로 무례한 요구를 하지 못한다. 국민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칙을 지키다가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명예를 회복한다. 하지만 정권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던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역사적 진실을 법원과 검찰의 구성원들은 기억하고 헌법적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바란다.


문화일보 2019. 3. 27.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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