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EU GDPR 대응보다 우리 법 손질 더 급해

2018-06-01

EU GDPR 대응보다 우리 법 손질 더 급해


오스트리아 개인정보보호단체가 페이스북과 구글이 개인정보보호법을 위반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법 위반이 인정되면 각각 4조원이 넘는 과징금을 물어야 한다. 5월 25일부터 유럽연합(EU) 회원국에서 개인정보보호법(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GDPR)이 시행되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 법은 EU 회원국과 국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EU에 법인이나 지점이 있는 외국 기업은 물론 법인이나 지점이 없어도 유럽 시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제품을 판매하는 외국 기업에 모두 적용된다. 


미국의 인터넷 기업들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2년 전 GDPR가 제정되어 시행을 예고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이 법의 제정 취지 자체가 EU 역내 기업을 보호하고 미국의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을 견제하기 위한 보호무역적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글로벌 기업들이 그동안 개인정보보호 정책을 느슨하게 해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GDPR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95년부터 시행된 EU 개인정보보호지침(Data Protection Directive)을 수정·보완하고 그 지위를 법령(regulation)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EU 디렉티브를 참조해 개인정보보호법을 제정했기에 우리나라 개인정보보호법은 GDPR와 그 기본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들이 미국처럼 크게 불안할 일은 없다. 더욱이 지난 2년 동안 GDPR 발효에 대비해 정부와 유관기관들이 비교적 철저한 준비를 해왔기 때문에 미국만큼의 충격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최근 언론과 일부 법률 전문가들이 GDPR 발효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당장에 EU 시장을 포기해야 할 것처럼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어 안타깝다. 지금은 근거 없는 불안감을 조성할 때가 아니다.


미래 사회의 핵심적 자산이라 할 수 있는 데이터를 선점하려는 미국, EU, 중국 등 강대국들의 패권적 쟁탈전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해법을 찾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가 가명처리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과 외국 기업이 국내 개인정보를 수집·이용하는 경우에 우리나라 법을 제대로 적용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역외 적용 방안을 확보하는 것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의 기본 구조는 개인정보를 수집·활용할 때 정보 주체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보 주체의 동의를 얻는 것이 사실상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때에는 해당 정보를 활용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빅데이터나 지능정보기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데이터(정보)의 수집과 활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활용이라는 가치 충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른바 가명정보(가명처리정보)의 활용에 관한 논의가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GDPR에서도 개인정보의 가명처리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의 사용 없이는 더 이상 특정 개인정보 주체에게 연계될 수 없는 방식으로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고 최근 제정된 일본 개인정보보호법도 익명가공정보라는 개념을 도입해 '익명가공정보란 특정 개인을 식별할 수 없도록 개인정보를 가공해 얻어지는 개인에 관한 정보로서 당해 개인정보를 복원할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회 4차산업혁명위원회에서도 개인정보보호법에서 가명처리 및 가명정보의 개념을 정립하고 정보 주체의 동의 없이 가명정보를 목적 외에 이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을 구체화하라고 권고했다. 


GDPR는 개인정보보호의 바이블이나 금과옥조가 아니다. EU와 교역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살길을 찾아야 한다. GDPR 규정 하나하나를 들이밀며 우리나라 개인정보보호법을 평가하는 사대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 이미 가명정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국회와 정부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4차 산업혁명의 막차라도 탈 수 있게 하루빨리 법을 손질해서 가명정보의 개념과 활용 범위를 명확하게 해주기 바란다.


매일경제 2018. 6. 1 매경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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