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규제 샌드박스, 어린이 놀이터 안되려면

2019-03-08

규제 샌드박스, 어린이 놀이터 안되려면


지난달 25~2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최대 통신 박람회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19'가 열렸다. 세계적 통신회사들이 자사 5G 이동통신 기술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불꽃 튀는 각축전을 벌였다. 3월 말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 기반의 5G 서비스 상용화가 예정돼 있는 우리나라 통신회사들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우리나라 기술에 세계인들 관심이 집중됐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그저 자랑스럽고 자축할 일만은 아니다. 5G 이동통신 기술은 이동통신망, 즉 네트워크를 고도화하는 기술이다. 쉽게 말해서 안전하고 빠른 도로를 수십 차로 확장하는 기술이다. 우리와 경쟁하는 선진국이 5G가 미래 산업의 핵심 기술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5G 상용화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통신망만 고도화해놓고 그 망에 실어 나를 콘텐츠나 망을 이용한 서비스가 뒤따르지 않으면 섣부른 5G 상용화가 오히려 막대한 투자 손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5G를 활용한 제품과 서비스가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출시돼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의 스타트업을 늘 가로막는 것은 '규제'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고, 이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염증이 난다. 정부가 고심 끝에 스타트업 활성화 대책으로 내놓은 게 이른바 '규제 샌드박스'다.


규제 샌드박스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할 때,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정부가 각종 규제를 일정 기간 면제 또는 유예해주는 제도다. 신기술·서비스가 규제로 인해 사업 시행이 불가능한 경우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실험·검증을 임시로 허용하는 '실증규제특례', 근거 법령이 없거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 이를 임시로 허가하는 '임시허가', 법령 적용 여부 또는 허가 필요 여부를 신속하게 확인해주는 '신속처리', 여러 부처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경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일괄적으로 신청을 받아 처리하는 '일괄처리'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규제 샌드박스는 규제의 완전한 배제가 아니라 시간적·장소적 제한이 설정돼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정 지역 안에서만 또는 일정 기간만 임시로 규제가 배제되는 것이다. 후속적인 법령 보완이 없으면 도로 물거품이 된다. 하지만 기존 산업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후속적 법령 개정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 이미 카풀 서비스, 공유숙박 서비스 등에서 경험한 바 있다. 기존 사업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거나 여론이 좋지 않으면 바로 얼굴을 바꾸고 외면해버리는 것이 지금까지 정부나 정치권이 보여준 태도다. 투자자들은 임시적 규제 배제만 믿고 사업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대체로 스타트업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초기에는 특별한 규제 이슈가 없다. 사업이 잘되고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 그때부터 기존 사업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민원 제기와 정부 규제로 사업을 접는 경우가 다반사다. 신기술·서비스에 대한 법령의 근거가 없거나 명확하지 않으면 규제 담당자가 규제 여부를 적극적으로 확인하거나 허가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괜히 선의로 민원을 적극적으로 처리했다가 감사원 감사에 걸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알고서 감사원에게 공무원의 적극 행정에 대해선 불리한 감사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일선 공무원이 그 말을 믿고 적극 행정을 할 리는 없다. 일선 공무원이 판단하기 곤란한 문제를 감사원에서 사전에 컨설팅해주는 제도가 신설됐지만 컨설팅 처리 기간이 너무 길고 컨설팅을 받았다 해도 법적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니라서 그 효용성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결국 정부가 야심 차게 내놓은 규제 샌드박스가 그야말로 어린이 놀이터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법령이 특별히 규제하고 있지 않거나 애매하게 규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무(無)규제를 원칙으로 하는 네거티브 규제가 실현돼야 한다. 또한 지나친 진입규제로 기존 산업이 비합리적 특혜를 얻고 있는 서비스는 법령 개정을 통해 진입장벽을 과감하게 무너뜨려야 한다. 후속적 법령 보완 작업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의지와 역량이 규제 샌드박스의 성패를 가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매일경제 2019. 3. 8 매경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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