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 개헌은 정치게임 아니다

2018-07-12

개헌은 정치게임 아니다


며칠 있으면 제헌절이다. 헌법이 만들어져 공포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헌법을 가진 대부분의 나라들은 헌법제정일을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만큼 주권국가에서 헌법이 가지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행 헌법은 1987년 10월 29일 개정되어 지금까지 30여 년 넘게 시행되고 있다. 그동안 시대적 상황이 많이 변했으니 헌법도 이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줄곧 있어 왔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충격적인 일을 겪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권한과 역할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들이 모아져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현실감 있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국민들의 이러한 바람과는 달리 정파적 이념과 정치적 셈법에 따라 각자의 방식대로 개헌을 추진하다 보니 개헌 논의가 오히려 국론 분열과 사회적 갈등만을 조장하고 말았다.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개헌 논의를 시작했으나 권력구조에 대한 지루한 공방만 계속하다가 별다른 성과도 없이 활동 기한이 종료되었다. 


청와대는 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별도의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발표했다. 조문 하나하나의 쟁점은 제쳐 두더라도 대통령 개헌안은 그 형식과 절차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다. 대통령 개헌안을 청와대와 대통령 비서실에서 주관하여 민정수석이 발표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절차다. 헌법이나 법률의 용어로 사용하기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문장이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채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들에 대해 공론화와 숙의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너무 조급하게 제출되었다는 비판이다. 헌법 전문에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시대적 가치를 추가할 것인지, 수도에 관한 규정을 신설할 것인지, 기본권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바꿀 것인지, 권력구조를 어떻게 개편할 것인지 등 수많은 쟁점들에 대해 제대로 논의할 시간적·환경적 여건이 전혀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헌안 처리의 무산 책임을 오로지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야당에만 지우는 것은 지나친 정치공세일 수 있다. 


정부가 법률을 발의할 때에도 부처 협의, 법제처 심사, 국무회의 등을 통해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는데 하물며 헌법개정안을 발의하면서 이러한 절차적 정당성도 갖추지 않은 채 대통령 자문위원회가 연구보고서를 작성하듯이 개헌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해 놓고 내용과 쟁점에 대한 검토도 없이 가부 찬반만을 표결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민주국가의 정상적인 개헌 절차라고 보기 어렵다. 


지방선거 후 한국당은 갑작스레 다른 야당들에 개헌연대를 제안하였다.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면 권력구조 개편과 함께 선거구제 개편 등 정치관계법에 대한 논의가 자연스럽게 제기될 것이라는 셈법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더불어민주당은 야당들에 개헌 논의를 일단 접고 개혁입법연대를 먼저 하자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여야 할 것 없이 개헌 논의를 당리당략을 위한 정치게임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매우 유감스럽다. 국회가 제정한 법률도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하면 그 효력이 사라진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의사를 무효화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헌법의 힘 때문이다. 그만큼 헌법의 개정은 신중하고 신중해야 하는 작업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토론과 숙의가 수없이 반복되어야 하는 인내의 과정이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의 활동 중 그나마 의미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개헌 쟁점들을 잘 정리해 둔 것이다. 이제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러한 쟁점들에 대해 하나하나 차근차근 공론화와 숙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정치권이 정치게임의 대상으로 불쑥 던지는 개헌 논의를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국회는 제헌절의 의미를 되새기고 개헌특위를 구성하여 개헌 논의를 진지하게 다시 이어가야 할 것이다.


매일경제 2018. 7. 12 매경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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